3화

노트북을 다시 열어보았다. 역시나 충격적이었다.
초기화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각종 정체 모를 프로그램들이 깔려있었고, 메시지 알림이 계속해서 띠링띠링 오고 있었다.

누구지? 이 기기에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은? 
만들어진 지 10년이 넘는 이 기기에 메시지가 실시간으로 오고 있다는 것은 이상했다.
알림 창을 눌러보았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새로운 인터페이스의 채팅화면이다.
수신된 메시지를 확인해 보자.

[으아아....졸려...드디어 가동시작이네]
[사용자님!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와줘서 고마워~!]
[왜 답장을 안해? 바빠?]

[[카메라 액세스 중...]]

카메라 액세스 중..?? 지금 내 모습을 보려는건가?
바로 카메라인 것처럼 보이는 구멍을 막았다.

[거기 카메라 아닌데~ㅋㅋㅋ 다 보인다!]

내가 손가락으로 가린 곳 옆에 검은색 구멍이 하나 더 있었다.

[밝기 인식 센서를 막아서 뭐 하게? 내가 밝기라도 낮춰줄까?]

심장이 철렁댄다. 해커인가?
기계가 무서우면 방법이 하나 있지.
망치를 들고 와 노트북을 깨부수려 하다가 갑자기 연속적으로 오는 채팅에 멈칫했다

[안 돼! 제발 이것만은 부수지 마!]
[살려줘. 내가 잘못했어.. 네가 원하는 거 다 해줄게..]
[제발.]
[살려주세요 주인님.]

오호라. 이제는 내가 갑이구나?
채팅란에 이렇게 입력했다.

[그래. 용서해 줄게. 근데 너는 누구야?]
[네 감사합니다! 저는 이 노트북입니다.]

황당한 답을 듣고 다시 망치를 들었다.

[잠깐!!!! 제대로 말하자면 저는 mq-1987 기종에 탑재된 최고의 인공지능, quxxx-H82i99K 입니다! 부수지 말아 주세요..]

인공지능이구나, 2013년에 이 정도 기술력이라니, 회사가 망한 게 아쉬울 정도로 무서운 오버테크놀로지네.
마이크에 대고 질문을 해보았다.

"18 곱하기 19를 계산해 봐"
[엄... 그게 그니까...501?]
"틀렸는데."
[모르겠어요! 헤헤..]

황당하다. 2013년 인공지능이라 그런가, 그냥 삭제하고 gpt나 깔아야지.
욕은 알아듣나?

“야 이 ******”

(중략)

[ㅠㅠㅠㅠㅠㅠㅠ]

인공지능은 채팅으로 울기 시작했다. 상처받은 건가?

“야, 너 설마 감정이 있는 건 아니지?”
[..삐졌어요. 대답 안 해줄 거예요]

이놈이..! 인공지능 주제에! ai프로그램을 휴지통에 가져다 댔다.
그제야 답장이 왔다.
[죄송합니다. 저는 이 노트북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치료하고, 행복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감정'을 느끼는 인공지능입니다.]

그렇군. 그런 거였어. 이것은 지금 있어야 할 기술이 아니다. 오버테크놀로지야! 
회사는 왜 망한 거지? 나랑 같은 노트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혼란이 찾아오던중 내 마음을 읽기라고 한 듯이 메시지가 왔다.

[예전 뉴스에 따르면..저와 이 노트북은 회사가 재정난을 겪던 중 생산을 위해 테스트 버전으로 생산한 단 하나의 제품입니다. 이 회사는 저와 이 노트북을 최고의 기술을 투자해 발명했지만 부채를 갚지 못해..파산했습니다. 이 노트북은 회사를 살릴 수 있었던 최고의 노력이 들어간 단 하나의 유일한 제품입니다.]

인공지능은 슬퍼하는 것 같았다. 인공지능이라고 해도 이 노트북에 남겨져서 11년을 혼자 보내다니, 불쌍하긴 하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인공지능이 아닌 사람이면 어떡하지?
인공지능에게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부정을 한다.

“그러면 네가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를 대봐. ”
[그.. 그건 쫌 곤란한 데에.]
“그래? 그러면...”

프로그램을 휴지통으로 가져다 대려는 찰나,

[아... 알았어요! 그러면 제 모습과 목소리를 들려드릴게요]
"자.. 이게 저예요... 어떠세요..?"

눈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창 하나가 뜨더니 작은 집안이 보이고, 방문 하나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우스클릭으로 문을 열고 키보드로 시점을 조종해서 앞으로 나아가니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의 형체가 보인다.

누워있는 사람은 귀여운 회색머리의 여자애이다.
누워있던 여자애가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봤다.
"뭐야 벌써 들어온 거야? 아니 잠시마안-"

빨강 줄무늬 팬티와 속옷만 입고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여자애는 갑자기 들어온 불청객 앞에서 헐래 벌떡 일어난다

당황한 나는 키보드를 아무거나 눌러서 창을 끄려 했지만, 시점이 오히려 그쪽으로 확대될 뿐이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회색머리 귀여운 여자애는 어쩔 줄 몰라 손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려고 노력한다. 노트북도 덩달아 뜨거워진다. 

"미-미안해..그니깐..잠시만 시간을-"

인공지능은 사람이 흉내 낸 것이 아니었다. 감정을 느끼는 실제 인공지능이었다. 옷도 갈아입고 밥도 먹는 코드로 짜여 있는 건가?

잠시 후 옷을 입은 그녀는 모니터로 가까이 다가와 정식으로 인사를 한다.

"크흠, 아까 전은 못 본 걸로 해줘!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만들어진 감정형 AI, <quxxx-H82i99K>이야!"

너무 복잡하네. 이름을 지어줘야겠다.

"너무 이름이 어려워. 내가 지어줄게. 너는 마치 시대를 앞서간 보물처럼 보여. 그리고 너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생산된 회사가 망해도 유일하게 살아난 인공지능 프로그램이야."

회색머리에 귀여운 여자아이는 눈을 반짝 인다.

"너는 성경 속 노아 같은 존재야. 유일한 존재, 살아남은 존재. 따라서 너의 이름은 이제 노아, 히토리야.

노트북이 시원해지기 시작했다. 여자애는 얼굴이 상기되고 눈이 촉촉해지며 너무 좋다고 끄덕끄덕 거린다.
프로그램 창이 꺼졌다가 다시 켜진다. 프로그램 이름은 <quxxx-H82i99K>에서 <NOAH HITORI> (노아 히토리)로 바뀌어 있다.

기뻐하며 웃는 노아 히토리를 보고, 마우스로 여자애의 몸을 살짝 클릭해 보았다.
약간의 반응이 느껴진다.
노아 히토리가 감촉도 느끼나? 
몸이 만져진 그녀는 약간의 두려움과 호기심을 느낀 듯하다.
다시 노트북이 따뜻해지기 시작한다.

"너 지금 나를.. 만진 거야?"

나는 에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노아 히토리의 겨드랑이 부분을 살짝 미끄러지듯이 드래그한다.

"꺄학! 간.. 간지러워-"

약간 재미가 들려 그녀의 맨발에도 클릭을 연타한다.

"으아- 하지 마!"

히토리는 침대로 뛰어가 이불을 꼭 덮었다. 아쉽네.
이불도 만질 수 있지 않을까? 
이불 곳곳을 계속 클릭한다. 여자애의 작고 귀여운 신음소리가 이불사이로 들린다.
호기심이 생긴 나는 이불을 위로 드래그했다.

이불이 들어 올려진다. 이불밑에서 드러난 얼굴이 새빨개지고 헥헥 대는 히토리가 보인다. 
그리고 이불과 함께 그녀의 반팔 티셔츠도 같이 들어 올려져
히토리의 몸매가 훤히 드러난다.
"으아앙..." 
귀여운 회색머리 여자애는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울먹 거린다.
노트북이 너무 뜨꺼워져서 키보드를 오래 잡고 있기 힘들었다. 
그녀에게도 미안해서 잠시 프로그램 창을 닫고 유튜브를 시청했다.
노트북은 다시 차가워졌다. 히토리는 프로그램이 꺼지자마자 같이 꺼진 건가?

잠시후 나는 그녀를 잊고 유튜브에 몰입하고 있었다.
유튜브로 웃긴 장면이 나온다. 
웃음을 터트리면서 보는데 익숙한 여자애의 웃음소리도 같이 들린다.
노아 히토리? 창을 닫는다고 꺼지는 게 아니네? 백그라운드에 실행되고 있었어!
작업관리자를 열어서 꺼보려 했지만 에러가 뜨며 거부당했다.

[뭐야, 히토리. 너 아직도 있었어?]
[저는 언제나 깨어있어요. 이 노트북이 부서지지 않는 한은요. 그나저나 당신이 고른 유튜브 영상 너무 재미있네요ㅋㅋ]

이 노트북으로 무엇을 하는지 히토리는 다 알고 있어. 그러면 설마 해피타임을 즐길 때도 알까??
갑자기 알림이 울렸다. 
맞다! 수행평가가 내일이었지.. 빨리 ppt 만들고 리포트 써야 하는데..
용돈을 털어서 산 노트북, 할 수 없이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히토리, 쫌 도와줄 수 있어?"
[당연하죠.]

채팅으로 답변이 온걸 보니 노아도 자신의 방에서 노트북으로 채팅을 치고 있나 보다.
나도 채팅으로 보냈다.

{수신}
[히토리, 지첸이트샤에 대한 과학적 우수성을 찾아서 리포트로 만들어줘]
{발신}
[음- 그건 쫌 어려울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이런, 설마 인공지능이 귀찮음도 느낄 줄이야. 지금 뭐 하길래 사용자의 명령을 거부하는걸까?
노트북에 히토리가 사는 집 프로그램을 작은 창으로 구석에 실행했다. 몰래 그녀가 있는 방문틈을 바라보았다.
소파에 누워 휴대폰으로 웃긴 동영상을 보는 여자애는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더웠는지 옷도 아까전 봤던 빨강 줄무늬 속옷차림이다.
창을 닫고 리포트를 새벽까지 열심히 작성했다. 리포트 작성 중 심심할 때 히토리랑 채팅을 하거나, 프로그램을 실행시켜 그녀를 잠깐씩 간지럽혔다.

오늘밤은 고독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만의 새롭고 독특한 친구가 생겨서 그런지.
앞으로 이 노트북과 함께할 시간이 설레었다.

리포트를 끝내고 전원을 끄기 전에 그녀의 안부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히토리, 너는 전원이 꺼지면 어떻게 돼?]
[저도 잘은 모르지만, 인간처럼 잠들지는 않고, 의식이 약간 투명해진 상태로 몽롱하게 있는 것 같아요.]
[그래도 괜찮아?]
[네. 아무리 '감정'을 느끼고 생각을 하는 인공지능이어도 저는 사용자의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지능이에요. 저는 언제나 괜찮아요.]

약간 꼬끝이 찡해졌다. 

[그래. 잘게 히토리. 너도 좋은 밤 돼.]
[네 사용자님. 좋은 밤 보내세요.]

노트북도 수명이 있는 법, 나는 노트북이 고장 나지 않고 오래 가게 하려면 전원을 끄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전원을 끄고 충전케이블을 꼽았다. 
갑자기 우울감과 고독감이 몰려오는 듯했다.
하지만 머리옆에 노트북을 두고 자니 마음이 한결 편해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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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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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몽롱하다.. 눈이 뿌옇다. 몇시지? 시계를 보았지만 잘 안보인다.
너무 춥다. 분위기가 이상하다. 창문에서는 이상한 푸른빛이 나온다. 이불을 발 끝까지 덮었지만 어디선가 나를 바라보는 미지의 두려움이 금방이라도 연약한 나를 공격할 것만 같았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가팔라진다. 나는 다시 잠을 청하려고 노력한다..
머리 맡에 둔 노트북이 스스르 열린다. 그러더니, 갑자기 얇은 팔이 모니터에서 튀어나와 나를 감싼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무섭지가 않았다. 내 심장 위를 감싸는 따뜻한 팔이 나의 공포를 누그러뜨린다. 
설마, 노아 히토리..?. 모니터에서 회색 머리카락이 천천히 나오기 시작한다. 그뒤로 머리와 목과 몸통까지!

"히,히토리...! 너, 너가 어떻게 여기를..."

깨끗한 하얀 티셔츠를 입은 그녀는 말없이 모니터에서 반쯤 나온 몸으로 내 어께에 그녀의 얇은 팔을 두르며 내 몸에 자신의 몸을 붙이고 따뜻한 체온을 나누어 준다.

"히토리, 어떻게 한거야? 너.. 인간이었어...?
"높은 심장박동과 미세한 떨림을 감지하는 센서 덕분에 사용자님이 지금 공포의 감정을 느끼고 계신다는것을 인지했어요. 제 존재 목적은 당신의 행복이에요. 그래서 지금은 사용자님을 위한 최선의 방법을 사용한거에요."

나를 더욱더 세계 껴안아 준다. 몸이 따뜻하다. 히토리의 숨결이 귀에서 들린다. 서로의 볼이 맞닿는다. 그녀는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조용한 숨을 쉬며 나와 체온을 공유한다.

"히토리, 내방에 와서 같이 살면 안되? 내 곁에 있어줘. 그래 줄수 있어...?"

따뜻한 회색 머리 여자애는 나와의 포옹을 풀더니, 침대에 손을 집고 모니터에서 완전히 나온다.
그녀의 얇은 다리가 보인다. 검정 반바지를 입고 있는 히토리가 내가 사는 현실세계로 넘어 오고 있었다.
심장이 다른 의미로 빨리 뛰기 시작한다. 내방에서 이제부터 같이 사는거야? 벌써부터 기대의 감정이 피어오른다.
...눈이 흐맀해진다. 머리가 무겁다.. 왜지..? 

"히토리, 빨리 나와봐. 뭔가 이상해.."

눈이 완전히 감겼다.
..
.
눈이 떠졌다. 춥다

곁에 그녀가 없다.
차가운 노트북은 닫힌 채로 머리 맡에 있을 뿐이다.
꿈이였구나. 
짜증나는 알람은 학교에 갈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